3. 용호정
구례군 토지면 용두마을은 지리산의 맥이 노고단 형제봉을 따라 내려오다가 섬진강에 이르러 머물렀는데 그곳이 용의 머리 부분이라고 하여 용두라 부르게 되었으며 지리산의 줄기가 강물을 만나는 곳에 용호정이 자리하고 있다.
구례군 토지면 용두마을은 지리산의 맥이 노고단 형제봉을 따라 내려오다가 섬진강에 이르러 머물렀는데 그곳이 용의 머리 부분이라고 하여 용두라 부르게 되었으며 지리산의 줄기가 강물을 만나는 곳에 용호정이 자리하고 있다.
구례군 토지면 용두마을은 지리산의 맥이 노고단 형제봉을 따라 내려오다가 섬진강에 이르러 머물렀는데 그곳이 용의 머리 부분이라고 하여 용두라 부르게 되었으며 지리산의 줄기가 강물을 만나는 곳에 용호정이 자리하고 있다.
1916년 건립된 용호정은 호수에서 용이 올랐다는 전설을 간직한 채 솔바람과 풍광이 어우러져 한 폭의 산수화를 연출합니다. 망국의 울분을 달래기 위해 구례 지역 유지들이 헐리게 된 고각루를 사들여 이곳에 옮겨 건립한 것이다.
매천 황현 선생의 스승이신 천사 왕석보 선생의 후학인 권봉수 선생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기셨습니다.
바위 언덕에 터를 닦아 이 한 정자 일으켰으니
위태롭다 백 척(百尺) 위에서 물가에 허리 구부렸어
섬진강에서 돌아온 돛대 가물가물 보이는데
오산(鰲山)에서 쇠 북소리 역력히 들려오네
우제단(雩祭壇) 빈터에 가시덤불 푸르고
사도촌(沙圖村) 입구엔 연기빛 푸르누나
유명한 이 지역 내 토지(土地) 아닌 것을 깨달았어
서쪽 바람에 홀로 서서 눈물만 흘렸다오
1920년경 이 시를 지은 지촌 권봉수 선생은 왕수환, 왕재소, 박해룡, 권석호 등과 함께 구례 사립학교인 호양학교를 설립한 분으로 호양학교가 1920년 폐교되는 등 일제의 감시와 핍박 그리고 망국의 한과 민족애를 한껏 담았다.
용호정 마루에 앉아 바라보는 섬진강 풍경은 너무 아름답다. 용호정 앞에는 섬진강을 따라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는데 이 길은 남도이순신길 수군재건로의 일부 구간이다.
1916년 건립된 용호정은 호수에서 용이 올랐다는 전설을 간직한 채 솔바람과 풍광이 어우러져 한 폭의 산수화를 연출합니다. 망국의 울분을 달래기 위해 구례 지역 유지들이 헐리게 된 고각루를 사들여 이곳에 옮겨 건립한 것이다.
매천 황현 선생의 스승이신 천사 왕석보 선생의 후학인 권봉수 선생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기셨습니다.
바위 언덕에 터를 닦아 이 한 정자 일으켰으니
위태롭다 백 척(百尺) 위에서 물가에 허리 구부렸어
섬진강에서 돌아온 돛대 가물가물 보이는데
오산(鰲山)에서 쇠 북소리 역력히 들려오네
우제단(雩祭壇) 빈터에 가시덤불 푸르고
사도촌(沙圖村) 입구엔 연기빛 푸르누나
유명한 이 지역 내 토지(土地) 아닌 것을 깨달았어
서쪽 바람에 홀로 서서 눈물만 흘렸다오
1920년경 이 시를 지은 지촌 권봉수 선생은 왕수환, 왕재소, 박해룡, 권석호 등과 함께 구례 사립학교인 호양학교를 설립한 분으로 호양학교가 1920년 폐교되는 등 일제의 감시와 핍박 그리고 망국의 한과 민족애를 한껏 담았다.
용호정 마루에 앉아 바라보는 섬진강 풍경은 너무 아름답다. 용호정 앞에는 섬진강을 따라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는데 이 길은 남도이순신길 수군재건로의 일부 구간이다.
용호정을 지나 섬진강 둑길을 따라 걷다 보면 멀리 구례읍이 눈에 들어온다. 잔잔하게 흐르는 섬진강, 섬진강의 물을 마시는 자라의 형상인 오산, 차일봉부터 왕시루봉까지 이어진 지리산 능선을 벗 삼아 여유롭게 걸을 수 있다.
용호정을 지나 섬진강 둑길을 따라 걷다 보면 멀리 구례읍이 눈에 들어온다. 잔잔하게 흐르는 섬진강, 섬진강의 물을 마시는 자라의 형상인 오산, 차일봉부터 왕시루봉까지 이어진 지리산 능선을 벗 삼아 여유롭게 걸을 수 있다.
용호정을 지나 섬진강 둑길을 따라 걷다 보면 멀리 구례읍이 눈에 들어온다. 잔잔하게 흐르는 섬진강, 섬진강의 물을 마시는 자라의 형상인 오산, 차일봉부터 왕시루봉까지 이어진 지리산 능선을 벗 삼아 여유롭게 걸을 수 있다.
4.조선수군출정공원
1597년 4월 26일 손인필 등 구례 사람들의 따뜻한 환대를 받으며 구례에 입성한 이순신 장군은 금부도사와 헤어지면서 본격적으로 백의종군 관련 군무를 수행하였습니다. 순천에 머물면서 정사준 등 여러 군관을 만나 전라도 연해안의 정보를 수집하고 향후 전략을 구상했다.
"상중에 몸이 피곤할 것이니, 몸이 회복되는 대로 나오라"라는 권율 장군의 명을 받은 이순신 장군은 정사준을 비롯한 유능한 군관을 대동하고 순천을 떠나 구례로 돌아와 다시 정보를 수집하고 전략을 수립하는 등 백의종군 군무를 수행하며 원수부로 가기 위한 준비를 하였다.
14일 동안 구례에 머물며 군자감 첨정 손인필, 체찰사 이원익 등과 승리 전략을 모색했습니다. 손인필은 군자감에 소속되어 군수품의 저장과 출납을 맡았던 인물로 장군에게 병참과 관련된 정보를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
권율 장군의 원수부로 가기 위해 5월 26일 구례를 떠나 석주관을 지나 악양, 하동, 옥종 등을 거쳐 원수부로 들어갔으며 이곳에서도 정보 수집 등의 군무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5월 26일 종일 큰비가 내렸다. 비를 맞으면서 길에 올라 막 떠나려는데, 사량 만호 변익성이 조사받을 일로 이종호에게 붙잡혀서 체찰사 앞에 왔다. 잠깐 서로 대면하고는 석주관의 관문에 가니, 비가 퍼붓듯이 내렸다. 말을 쉬게 하고 간신히 엎어지고 자빠지면서 악양의 이정란의 집에 당도했는데, 문을 닫고 거절하였다.“
노승석 지음 <난중일기>
이때 손인필의 장남 손응남은 장군의 명을 받아 연해안의 정보를 수집하는 등 이순신 곁을 지켰으며 칠천량 해전의 패배 소식을 접하고 장군의 명을 받고 구례로 돌아왔다.
칠천량 해전의 패배로 조선 수군은 궤멸되었고 조선의 운명은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롭게 되었지만 이순신 장군은 직접 주변의 전황을 파악하기 위해 8월 3일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용될 때까지 동분서주했다.
1597년 8월 3일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용된 이순신 장군은 군관 9명, 병졸 6명과 함께 구례에 재입성했다.
1597년 4월 26일 손인필 등 구례 사람들의 따뜻한 환대를 받으며 구례에 입성한 이순신 장군은 금부도사와 헤어지면서 본격적으로 백의종군 관련 군무를 수행하였습니다. 순천에 머물면서 정사준 등 여러 군관을 만나 전라도 연해안의 정보를 수집하고 향후 전략을 구상했다.
"상중에 몸이 피곤할 것이니, 몸이 회복되는 대로 나오라"라는 권율 장군의 명을 받은 이순신 장군은 정사준을 비롯한 유능한 군관을 대동하고 순천을 떠나 구례로 돌아와 다시 정보를 수집하고 전략을 수립하는 등 백의종군 군무를 수행하며 원수부로 가기 위한 준비를 하였다.
14일 동안 구례에 머물며 군자감 첨정 손인필, 체찰사 이원익 등과 승리 전략을 모색했습니다. 손인필은 군자감에 소속되어 군수품의 저장과 출납을 맡았던 인물로 장군에게 병참과 관련된 정보를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
권율 장군의 원수부로 가기 위해 5월 26일 구례를 떠나 석주관을 지나 악양, 하동, 옥종 등을 거쳐 원수부로 들어갔으며 이곳에서도 정보 수집 등의 군무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5월 26일 종일 큰비가 내렸다. 비를 맞으면서 길에 올라 막 떠나려는데, 사량 만호 변익성이 조사받을 일로 이종호에게 붙잡혀서 체찰사 앞에 왔다. 잠깐 서로 대면하고는 석주관의 관문에 가니, 비가 퍼붓듯이 내렸다. 말을 쉬게 하고 간신히 엎어지고 자빠지면서 악양의 이정란의 집에 당도했는데, 문을 닫고 거절하였다.“
노승석 지음 <난중일기>
이때 손인필의 장남 손응남은 장군의 명을 받아 연해안의 정보를 수집하는 등 이순신 곁을 지켰으며 칠천량 해전의 패배 소식을 접하고 장군의 명을 받고 구례로 돌아왔다.
칠천량 해전의 패배로 조선 수군은 궤멸되었고 조선의 운명은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롭게 되었지만 이순신 장군은 직접 주변의 전황을 파악하기 위해 8월 3일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용될 때까지 동분서주했다.
1597년 8월 3일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용된 이순신 장군은 군관 9명, 병졸 6명과 함께 구례에 재입성했다.
8월 3일 [양력 9월 13일]<신해> 맑다. 이른 아침에 선전관 양호가 뜻밖에 교유서를 가지고 왔다. 명령은 곧 겸 삼도수군통제사의 임명이다. 숙배를 한 뒤에 다만 받들어 받았다는 글월을 써서 봉하고, 곧 떠나 두치로 가는 길로 곧바로 갔다. 초저녁에 행보역에 이르러 말을 쉬고, 한밤 12시에 길을 떠나 두치에 이르니, 날이 새려 했다. 남해 현령 박대남은 길을 잘못 들어 강정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말에서 내려 기다렸다가 불러와서, 쌍계동에 이르니, 길에 돌이 어지러이 솟아있고, 비가 와 물이 넘쳐흘러 간신히 건넜다. 석주관에 이르니, 이원춘과 류해가 복병하여 지키다가 나를 보고 적을 토벌할 일을 많이 말했다. 저물어서 구례현에 이르니, 일대가 온통 쓸쓸하다. 성 북문 밖에 전날의 주인 집으로 가서 잤는데, 주인은 이미 산골로 피난 갔다고 했다. 손인필은 바로 와서 볼 겸 하여 곡식까지 가져왔다. 손응남은 올감을 바쳤다.
노승석 지음 <난중일기>
칠천량 해전의 패배로 조선의 백성들은 피난 가기에 바빴고 가지고 갈 수 없는 식량과 무기는 모두 불태웠습니다. 하지만 구례의 백성들은 석주관성을 지나 구례에 입성한 이순신 장군을 다시 한번 따뜻하게 맞이했으며 먹을 것이 부족했음에도 이순신 장군에게 식량을 바쳤고 나무에 걸린 덜 익은 감을 따서 바쳤다.
구례에 재입성한 이순신 장군은 구례 백성으로부터 조선 수군을 재건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보았고 곡성, 순천, 보성 등 전라도의 해안 마을을 거쳐 조선 수군을 재건하기 시작했다.
8월 3일 [양력 9월 13일]<신해> 맑다. 이른 아침에 선전관 양호가 뜻밖에 교유서를 가지고 왔다. 명령은 곧 겸 삼도수군통제사의 임명이다. 숙배를 한 뒤에 다만 받들어 받았다는 글월을 써서 봉하고, 곧 떠나 두치로 가는 길로 곧바로 갔다. 초저녁에 행보역에 이르러 말을 쉬고, 한밤 12시에 길을 떠나 두치에 이르니, 날이 새려 했다. 남해 현령 박대남은 길을 잘못 들어 강정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말에서 내려 기다렸다가 불러와서, 쌍계동에 이르니, 길에 돌이 어지러이 솟아있고, 비가 와 물이 넘쳐흘러 간신히 건넜다. 석주관에 이르니, 이원춘과 류해가 복병하여 지키다가 나를 보고 적을 토벌할 일을 많이 말했다. 저물어서 구례현에 이르니, 일대가 온통 쓸쓸하다. 성 북문 밖에 전날의 주인 집으로 가서 잤는데, 주인은 이미 산골로 피난 갔다고 했다. 손인필은 바로 와서 볼 겸 하여 곡식까지 가져왔다. 손응남은 올감을 바쳤다.
노승석 지음 <난중일기>
칠천량 해전의 패배로 조선의 백성들은 피난 가기에 바빴고 가지고 갈 수 없는 식량과 무기는 모두 불태웠습니다. 하지만 구례의 백성들은 석주관성을 지나 구례에 입성한 이순신 장군을 다시 한번 따뜻하게 맞이했으며 먹을 것이 부족했음에도 이순신 장군에게 식량을 바쳤고 나무에 걸린 덜 익은 감을 따서 바쳤다.
구례에 재입성한 이순신 장군은 구례 백성으로부터 조선 수군을 재건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보았고 곡성, 순천, 보성 등 전라도의 해안 마을을 거쳐 조선 수군을 재건하기 시작했다.
8월 3일 [양력 9월 13일]<신해> 맑다. 이른 아침에 선전관 양호가 뜻밖에 교유서를 가지고 왔다. 명령은 곧 겸 삼도수군통제사의 임명이다. 숙배를 한 뒤에 다만 받들어 받았다는 글월을 써서 봉하고, 곧 떠나 두치로 가는 길로 곧바로 갔다. 초저녁에 행보역에 이르러 말을 쉬고, 한밤 12시에 길을 떠나 두치에 이르니, 날이 새려 했다. 남해 현령 박대남은 길을 잘못 들어 강정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말에서 내려 기다렸다가 불러와서, 쌍계동에 이르니, 길에 돌이 어지러이 솟아있고, 비가 와 물이 넘쳐흘러 간신히 건넜다. 석주관에 이르니, 이원춘과 류해가 복병하여 지키다가 나를 보고 적을 토벌할 일을 많이 말했다. 저물어서 구례현에 이르니, 일대가 온통 쓸쓸하다. 성 북문 밖에 전날의 주인 집으로 가서 잤는데, 주인은 이미 산골로 피난 갔다고 했다. 손인필은 바로 와서 볼 겸 하여 곡식까지 가져왔다. 손응남은 올감을 바쳤다.
노승석 지음 <난중일기>
칠천량 해전의 패배로 조선의 백성들은 피난 가기에 바빴고 가지고 갈 수 없는 식량과 무기는 모두 불태웠습니다. 하지만 구례의 백성들은 석주관성을 지나 구례에 입성한 이순신 장군을 다시 한번 따뜻하게 맞이했으며 먹을 것이 부족했음에도 이순신 장군에게 식량을 바쳤고 나무에 걸린 덜 익은 감을 따서 바쳤다.
구례에 재입성한 이순신 장군은 구례 백성으로부터 조선 수군을 재건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보았고 곡성, 순천, 보성 등 전라도의 해안 마을을 거쳐 조선 수군을 재건하기 시작했다.
8월 3일 [양력 9월 13일]<신해> 맑다. 이른 아침에 선전관 양호가 뜻밖에 교유서를 가지고 왔다. 명령은 곧 겸 삼도수군통제사의 임명이다. 숙배를 한 뒤에 다만 받들어 받았다는 글월을 써서 봉하고, 곧 떠나 두치로 가는 길로 곧바로 갔다. 초저녁에 행보역에 이르러 말을 쉬고, 한밤 12시에 길을 떠나 두치에 이르니, 날이 새려 했다. 남해 현령 박대남은 길을 잘못 들어 강정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말에서 내려 기다렸다가 불러와서, 쌍계동에 이르니, 길에 돌이 어지러이 솟아있고, 비가 와 물이 넘쳐흘러 간신히 건넜다. 석주관에 이르니, 이원춘과 류해가 복병하여 지키다가 나를 보고 적을 토벌할 일을 많이 말했다. 저물어서 구례현에 이르니, 일대가 온통 쓸쓸하다. 성 북문 밖에 전날의 주인 집으로 가서 잤는데, 주인은 이미 산골로 피난 갔다고 했다. 손인필은 바로 와서 볼 겸 하여 곡식까지 가져왔다. 손응남은 올감을 바쳤다.
노승석 지음 <난중일기>
칠천량 해전의 패배로 조선의 백성들은 피난 가기에 바빴고 가지고 갈 수 없는 식량과 무기는 모두 불태웠습니다. 하지만 구례의 백성들은 석주관성을 지나 구례에 입성한 이순신 장군을 다시 한번 따뜻하게 맞이했으며 먹을 것이 부족했음에도 이순신 장군에게 식량을 바쳤고 나무에 걸린 덜 익은 감을 따서 바쳤다.
구례에 재입성한 이순신 장군은 구례 백성으로부터 조선 수군을 재건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보았고 곡성, 순천, 보성 등 전라도의 해안 마을을 거쳐 조선 수군을 재건하기 시작했다.
1597년 8월 4일 구례를 출발한 이후 44일 만인 9월 16일 명량 앞바다에서 전쟁의 흐름을 바꾸어 놓은 명량대첩을 승리로 이끄셨다. 구례 통제영에서의 출정 결의가 명량대첩의 승리를 이끌었던 것이다.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44일간의 조선 수군 재건의 시작은 바로 구례였고 명량대첩 승리의 초석은 바로 구례에서의 출정 결의였다.
이순신 장군이 가장 힘든 시기에 가장 힘이 되어준 인물이 바로 손인필이다.
1597년 8월 4일 구례를 출발한 이후 44일 만인 9월 16일 명량 앞바다에서 전쟁의 흐름을 바꾸어 놓은 명량대첩을 승리로 이끄셨다. 구례 통제영에서의 출정 결의가 명량대첩의 승리를 이끌었던 것이다.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44일간의 조선 수군 재건의 시작은 바로 구례였고 명량대첩 승리의 초석은 바로 구례에서의 출정 결의였다.
이순신 장군이 가장 힘든 시기에 가장 힘이 되어준 인물이 바로 손인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