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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동면 위치도

산동면 마을유래

연혁

남원부 산동방(山洞坊)으로 1864년경에 내산동과 외산동으로 분면되었는데 광무원년(1897)에 구례군에 편입되었고 지리산 안쪽의 내산면과 바깥쪽의 외산면이었다. 내산면은 계척, 연관, 현천, 삼성, 수락, 중기, 상원덕, 하원덕, 달전, 수평, 내효, 외효, 구산, 반평, 하관, 사포, 월계, 상위, 하위, 평촌, 신평, 대양, 대음, 반곡, 창촌, 상관, 좌사, 당동, 등 28개 마을이었고 외산면은 정산, 탑동, 원동, 시랑, 상신, 하신, 한천, 지초, 외온, 내온, 이촌, 평산, 우와, 오향, 토치, 둔기, 이사, 상무, 하무 등 19개 마을이었다. 그런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탑정, 원촌, 시상, 외산, 이평, 신학, 둔사 등 7개 리로 구례군 외산면으로, 계천, 수기, 원달, 내산, 관산, 위안, 대평, 좌사 등 8개 리로 구례군 내산면으로 개편하였는데 1932년 11월 1일에 내산면과 외산면을 병합하여 산동면으로 개칭하였다. 산동은 지리산 밑의 골짜기이므로 ‘산골’이라 불렀고 고려 때 산동부곡(山洞部曲), 조선 시대에 산동방(山洞坊)이라 불렀으며 산동원(山洞院)이 원촌에 있었다. 동쪽으로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 남쪽으로 토지면, 마산면, 광의면, 용방면, 서쪽으로 곡성군 수지면과 고달면, 북쪽으로 전라북도 남원시 주천면에 닿았다.

위치

구례에서 가장 북쪽 끝에 있다. 동쪽으로 경남 하동군, 서쪽으로 곡성군 고달면, 북쪽으로 전북 남원시와 경계가 닿았고 남쪽으로 용방면과 광의면이 붙어 있다. 수락골, 산동골, 둔산골에 있는 면이다. 말 그대로 지리산 깊은 산골 마을이다.

산동면 마을

원촌리

원촌(院村)마을

조선 성종 때 김 씨와 공 씨가 처음 정착하여 설촌 하였으며 임진왜란 전후에 이 씨와 박 씨, 유 씨가 정착하면서 큰 마을로 발전되어 원(院)을 두었다. 여순 사건과 6.25 동란으로 80%가 전소된 후 다시 복구되었다. 마을 이름은 당초 월천(月川)으로 부르다가 원촌(元村)으로 바뀌었으며 그 후 다시 원(院)이 있었던 곳이라 하여 원촌으로 개칭되었다. 기록에 보면 옛날에 산동원(山洞院)이 계척동에 있었던 것을 인조 23년(1645)에 운제(雲梯(지금의 원촌)로 옮겼고 운제원(雲梯院)으로 개칭된 것이다.

계천리

현천(玄川)마을

설촌 시대는 확실하지 않으며 맨 처음 화순 최씨가 터를 잡아 마을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마을 지명은 마을 뒷산인 견두산이 ‘현(玄)’자형으로 되어있고 뒷내에는 옥녀봉의 옥녀가 매일같이 빨래를 하고 선비가 고기를 낚는 어옹수조(魚翁水釣)가 있어 그 아름다움을 형용하여 ‘현천’이라 하였다. 한문으로는 玄川이고 순한글로는 ‘개머내’라고 부른다.

연관마을

조선 중엽 고 씨가 남원으로 가던 중 산 밑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고 길조라 여기고 정착함으로써 마을이 형성되었다. 설촌 당시 산 밑에서 연기가 피어난 곳이라 하여 마을 이름은 연관이라 부르게 되었다.

송평(松坪)마을

1940년경 정 씨가 정착하면서 형성된 자연 마을로 인근 연관 마을에 귀속되었다가 해방 후 독립 자연 마을로 떨어져 나왔다. 화순 최씨 집안에서 충신 2명, 효자 1명, 열녀 1명이 배출된 마을이라 하여 효자 모퉁이라 부르다 앞산에 소나무가 많아 송평이라 개칭하여 부른 것이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지금도 노인들은 효자 모퉁이라 부르고 있다.

계척(桂尺)마을

임진란을 피하여 조선 선조 시대에 오 씨와 박 씨가 정착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 이름은 "계천(溪川)"이라 부르다가 마을 중심으로 흐르는 냇물이 계수(桂樹)나무처럼 생겼다 하여 "계(桂)"자와 임진왜란을 피하여 베틀 바위 안에서 베를 짜서 자(척)로 재었다 하여 "척(尺)"자를 써서 "계척"으로 개칭하였다.

원동(元洞)마을

1600년경 남원에서 훈장으로 있던 창녕 조씨가 내려와 마을을 세우며 관멱(官覓)이 난다는 풍수지리설에 의해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원래 마을 이름은 원곡(元谷)이었으나 원님이 구례에서 남원으로 가는 도중 쉬었다 가는 곳이라 하여 원동으로 개칭하였다.

원달리

상원(上元)마을

고려 충렬왕 때(서기 1300년경) 북방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동 씨, 박 씨가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설촌 당시 원덕(元德)이라 하였는데 한일 합병 이후 남원군에서 구례군으로 편입되면서 상원으로 개칭되었다. 원덕이라 칭함은 고려시대 밀양 박씨 일가가 이 마을에 터를 잡고 살면서 덕을 으뜸으로 삼고 주민들과 화합하여 살자는 뜻으로 명명하였다 한다. 행정구역 개칭 때 상원, 하원이 분리 되면서 상원이 위쪽에 있다 하여 상원으로 개칭되었다.

하원(下元)마을

당초에는 하원으로 독립마을 이었으나 행정구역 통합으로 인해 상원에 예속되었다. 상원의 아래쪽 마을이라 하여 하원이라 칭하였고 임진왜란 이후에 설촌되었다고 전해지며 이곳을 지나던 길손이 한 두 호씩 입주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양 씨와 유 씨가 제일 먼저 터를 잡았다고 전해진다.

달전(達田)마을

고려 시대 나주 임씨가 이곳을 지나다가 밭이 넓으므로 곡식이 많을 것이라 하여 정착하였다 한다. 그 뒤 강씨가 집성촌을 이루었다. 예전에는 이곳을 땅 혈이 배같이 생겼다 하여 맷터라고 불렀다. 그러다 밭이 많아 달전이라 칭하였다.

수기리

중기(中基)마을

임진란을 피하여 경주 김씨가 처음 정착하였으며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이 곳이 김 씨의 길지(吉地)라 하여 마을을 형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중기라 함은 마을 위치가 가난한 터로 아주 부족한 것도 아니고 중간정도 간다 하여 중기라고 칭하였다 한다.

수락(水落)마을

폭포에서 차로 5분 정도 오르면 수락 마을이 나온다. 현재 8가구가 살고 있다. 논밭이 없다. 산자락 편편한 언덕배기에서 산막을 치고 살던 화전민 마을이다. 조선 시대에는 피난지였다. 양길순은 산골 여기저기에서 산막을 치고 감자를 심고 산채를 뜯어 살아왔는데 수락 마을에 집이 한 채 있던 곳을 ‘독가청’이라 부른 곳이 2곳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안동 권씨가 8대째 살았는데 그전에도 사람이 살았으며 마을이 가장 컸을 때는 40여 가구였다. 일제 때 꼿밧등(꽃밭등)에 일본 장군이 일장기를 들고 서 있다가 독사에 물려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여순 사건 때 토벌군이 반란군에게 해준다고 주민을 삼성 마을로 소개시키고 마을에 불을 질러 태워 버렸다. 1950년 중반에 돌아와 집을 짓고 살아왔다고 했다. 1974년 김신조 등 무장간첩 난파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 정부에서 폭포 아래로 이주하면 보조금을 준다고 하였으나 마을 사람들이 반대하여 산막에서 수락 마을로 내려와 모여 살았다. 그 때 당시에는 30여 가구가 살았다고 한다. 1999년경까지 섣달 그믐 밤 12시에 당산제를 지냈다. 호랑이가 해를 주지 않고 하려고, 그런데 지금은 초저녁에 막걸리를 붓고 절을 올리고 있다. 약식 당산제를 지낸 것이다. 임진난 때 해주 오씨가 피난터로 들어와 정착함으로써 마을이 형성되었다 한다. 수락폭포 물이 떨어진 마을이라 하여 수락이라 하였다.

내산리

수평(水坪)마을

고려 후기 우왕(禑王) 때 설촌되었다고 하나 뚜렷한 전거가 없다. 옛날 마을에 창고가 많다 하여 국창촌(國倉村)이라 불렀으나 모진 가뭄에도 수막애 끊어지지 않고 물이 흔하다 하여 수평으로 개칭하였다 한다.

삼성(三星)마을

조선 세종 때에 전주 이씨가 정착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원래는 띠가 많다하여 ‘띠밭들’이라 불리어 오다가 조선 말기에 별 모양의 큰 바위가 있어 이를 상징하여 삼성으로 개칭하였다. 내산면 때에는 면소재지가 있었다. 주민들이 정월에 별 모양의 바위에 맛있는 음식을 차려놓고 하루를 즐기는 행사도 있었다고 한다.

효동(孝洞)마을

임진왜란 이후에 남원에서 이주하여 온 밀양 박씨가 정착하면서 설촌되었다고 한다. 당초 소 배를 의미하는 소통굴이라 불렀으나 마을 뒷산이 청용고지 지세가 효자가 많이 나온다는 설에 의하여 마을이 완전히 형성되면서부터 효동이라 불리게 되었다.

부촌(富村)마을

설촌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마을 형성은 면소재지에 가깝고 교통이 편리하여 경제 활동이 용이하여 한 집 두 집이 모이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옛날에는 원촌 마을과 이웃하고 있어 ‘건너뜸’으로 불려 오던 중 1897년경 마을 중앙에 내산(內山) 면사무소를 신축하여 면정을 관장하다가 3년 후 원촌으로 이전하였다. 그 후 마을 회의를 거쳐 부온으로 개칭되었다.

대평리

대양(大陽)마을

설촌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마을 앞들이 넓고 따뜻하여 농사짓기가 좋아 사람들이 모여 살기 시작했다. 옛날 우리말로는 따뜻한 햇빛이 비치는 마을이라 하여 ‘양지뜸’이라 불렀는데 일제강점기부터 대양으로 불리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신평(新坪)마을

조선 영조 때 평촌 마을에 거주했던 유 씨가 산 밑에 평야가 있음을 보고 이주하게 되어 마을이 형성되었다. 그 뒤 여러 성씨가 모여 마을을 이루었다. 여순사건 전만 해도 25호까지 번성했다고 한다. 유씨가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신평이라 부르게 되었다.

평촌(坪村)마을

조선 숙종 때 남양 홍씨가 이 지역에 정착하면서 설촌되었다. 들 가운데에서 생긴 마을이라 하여 평촌이라 부르게 되었다.

반곡(盤谷)마을

조선 숙종 10년(1684)경 대음 마을과 같이 남양 홍씨가 정착하면서 설촌 되었다고 한다. 대평리 5개 마을 중에서 4개 마을은 1덩어리로 형성되어 있으나 유독 이 곳 마을은 개울 건너 따로 떨어진 섬 같은 마을이라 하여 서만이라 부르다가 골짜기 밑에 소반같이 평야지에 마을을 형성하였다 하여 반복으로 개칭하였다.

대음(大陰)마을

약 300여 년 전 남양 홍씨가 위안리에서 대평리 일대에 정착하면서 설촌되었다. 설촌 당시 큰 마을이 형성될 것이라는 풍수지리설에 의하여 ‘큰터’라고 부르다가 일제강점기에 대음으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위안리

상위(上位)마을

조선 정유재란 무렵 구 씨, 정 씨, 홍 씨의 3성씨가 들어와 설촌되었다고 한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오천석(五千石)의 부유한 터라 하여 마을이 형성되었고 여순 사건 당시에는 85호까지 번성하였다 한다. 능성 구씨 세보에 의하면 당초에는 위안리(委安里)였으나 그 후 위안리(位安里)로 변천하였다. 마을 이름은 설촌 당시에는 ‘오천석 도장굴’이라 칭하였으나 벼슬을 하고 살기 좋은 마을이라 하여 상위라 개칭하였다.

하위(下位)마을

약 170여 년 전에 상위 마을에서 능성 구씨 집안에서 하위마을로 내려오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설촌 당시에는 새로 만든 터라하여 ‘샛터’라 부르다가 상위 마을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하위로 개칭하였다.

월계(月溪)마을

조선 임진왜란 전부터 사람이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정확한 연대는 알 수가 없고 전하는 말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왜군과 이곳에서 싸웠다는 설도 있다. 그 뒤에는 하위 마을에서 넘어온 구 씨들이 이곳에 터를 잡고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다고도 한다. 설촌 당시에는 이곳에서 도자기를 굽는 점토(粘土)가 나오는 마을이라 하여 ‘점몰’이라 부르다가 행정구역 개편 때 월계로 개칭되었다.

좌사리

원좌(元佐)마을

원좌 마을을 ‘좌새’, ‘자새’라고도 하며 우리말 이름이다. 이를 한자로 좌조(坐鳥)라 적었다. 1914년에 좌사리로 바뀌자 원래 ‘좌새’ 마을이란 뜻으로 마을 앞에 ‘원좌 마을’이라 새긴 표석이 서 있다. 마을 앞에 모자를 벗어놓은 것처럼 두둑한 동산에 당산이 있다. 주위에 아름드리 서나무, 팽나무들이 서 있으나 당산 중앙에 서 있는 당산나무는 소나무다. 10년 전까지 당산제를 섣달그믐날에 지냈는데 금기 사항이 많고 사는 사람도 적어서 현재는 지내지 않는다. 당산이 뒷산 줄기가 뻗어 내려오다가 새가 고개를 쳐드는 것처럼 솟았다. 그리고 좌조영사(坐鳥令沙)란 명당이 있다. 거기가 윤씨 선산이다. 원좌 마을 표석이 서 있는 좌측 산줄기 끝자락에 적석탑이 2기가 서 있다. 풍수상 마을의 허전한 곳을 보충해주고 지기가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막아주고 전염병을 퍼뜨린 역신이 들지 못하도록 세운 벽사탑(僻邪塔)이다.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설촌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설에 의하면 조선 영조 때 금녕 김씨에 의해 개척되었고 그 뒤 전주 이씨 등이 들어와 마을이 형성되었다. 한때 이 씨, 김 씨의 집성촌이기도 하였다. 원래 이름은 마을 생김새가 새가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이라 하여 ‘좌새’라 부르다가 일제강점기에 높은 곳이라 하여 원좌라 개칭하였다.

당동(堂洞)마을

설촌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약 500여 년 전에 생긴 마을로 추정하며 여순 사건 전에는 20호까지 살았다고 한다. 한때 당골이라 부르기로 했다. 지금부터 150여 년 전에는 마을 성황당에서 매년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여기서 ‘당(堂)’자를 인용해 현재 당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상관(上官)마을

정확히 설촌한 시대를 알 수 없으나 원래는 좌사리 660~680번지 일대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한다. 그러다가 그 곳에서 사람이 이유없이 죽자 마을을 지금의 장소로 강제로 옮겼다 한다. 지금도 600~680번지 일대에 옛날에 쓰던 옹기들이 출토되고 있다. 그 뒤 손 씨, 양 씨, 허 씨 등이 들어와 최초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현재도 마을 뒤 일대에 주인 없는 묘들은 손 씨들의 묘가 대부분이라 한다. 상관 이란 옛날 이곳 마을에 관청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아마도 이곳 마을이 중동 일대의 중심지였던 모양이다.

심원(深源)마을

설촌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약 300년 정도로 예상된다. 약 4km의 아래쪽에 달궁이라는 옛날 궁터가 있는 곳으로 미루어 보아 짐작건대 삼국시대에 설촌된 마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때는 여순 사건 전만 해도 약 80여 호의 많은 사람이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마을 주변이 깊은 산 속에 있다 하여 심원이라 부르게 되었다. 1987년 지리산관광도로 개통 이후 관광객이 유입되면서 식당과 민박 등이 운영되기 시작했고, 계곡 등 주변지역 오염 문제가 꾸준히 제기돼 왔다. 이에 국립공원관리공단은 환경 보전을 위해 심원마을 주민들을 대상으로 지속적인 설득과 동의를 구한 뒤, 2013년부터 철거 및 복원 사업 등 이주사업을 진행하여 2017년 11월 완료하였다.

관산리

사포(巳浦)마을

주 씨, 남 씨, 하 씨, 이 씨가 들어와 설촌하였다. 하 씨가 임진왜란 때 난을 피하여 들어와 정착했다는 말이 전해오지만 그에 앞서 주 씨, 남 씨가 하 씨보다 먼저 들어왔다는 말도 있다. 옛날에는 ‘뱀개’로 부르다가 한자의 음을 따서 뱀사(巳), 개포(浦)의 두 음을 따서 사포라 부르게 되었다.

반평(盤坪)마을

조선 고종 말 남원에 살던 김택주(金澤柱)가 이 곳에 금반을 잡고 터를 닦아 설촌하였다. 그리고 그의 동생인 김규열과 더불어 독립운동을 한 공로로 포상 및 훈장을 받았다. 옛날 마을 집터를 닦을 때 전혀 상하지 않은 밥상이 발견되어 반평이라 했다고 전해진다.

구산(龜山)마을

설촌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설에 의하면 김 씨와 박 씨, 허 씨, 이 씨 등의 4성씨가 들어와 설촌하였다. 구산이라 함은 마을 뒷산이 거북이와 같다하여 구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하관(下官)마을

설촌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조선조 때 경주 이씨가 제일 먼저 들어와 설촌된 것으로 추정한다. 그 뒤 공 씨, 오 씨 등이 들어와 마을을 이루었다. 마을 이름은 관직이 많이 등용될 위치라 하여 하관이라 부르게 되었다.

등구정(登龜亭)마을

설촌 시기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작은 마을이지만 중동초등학교, 교회, 진료소, 농협 분소 등 중요 기관들이 있는 마을이다. 마을 이름은 구산 마을 뒷산이 거북이 형인데 이 거북이가 머리를 들고 올라온 형이라 해서 등구정으로 부르다가 지금은 등구평으로 부르고 있다. 법정리로는 관산리에 속하며 행정지로는 구산 마을에 속한다.

탑정리

정산(挺山)마을

삼국 시대에 박 씨가 이 고장을 지날 때 눈이 많이 내렸는데 이곳만은 눈이 없고 연기가 피어오름으로 가까이 가본즉 흔적이 없기에 신기하게 생각하고 그 자리에 정착하여 살게 된 것이 설촌 동기이다. 조선 시대에는 객산방(客山房)이라 하였는데 이조 말기에 이르러 정산으로 개칭되었다.

탑동(塔洞)마을

백제 의자왕 시대 감부현(甘富縣) 소속으로 마을 입구에 암자가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현재 탑 1기만 남아 있다. 조선 중종 때 남원 양씨 공지(公之) 선생이 거주하다가 숙종 시대에 홍주 이씨 재춘(再春)이 남원 보절에서 이주하여 정착함으로써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 입구에 신라시대 탑이 있어 탑동이라 칭하였다.

외산리

한천(寒泉)마을

조선 정조 때 설촌된 마을이다. 원래 섬몰이 옛 마을 터이다. 외산리 55번지 일대에 순흥 안씨들이 들어와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에 있는 우물이 유달리 찬물이 솟아나기에 ‘참샘’이라고 불러오다가 한자로 기록하여 한천으로 개칭되었다.

내온(內溫)마을

조선 효종 때 배 씨가 처음 터를 잡아 설촌 한 마을로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징터’라 하는데 징이라 하면 울음의 여운이 커졌다 작아졌다 하므로 이 마을도 한번 흥하면 한번 망한다고 전해진다. 일제시대 때는 외산면 소재지가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당초에는 ‘왼다몰’이라 칭하였는데 돌이 많아 돌로 담을 쌓았다는 말에서 유래하는 말이다. 그 후 마을 인심이 좋고 인정이 많은 마을이라 하여 내온이라 개칭하였다.

지초(芝草)마을

조선 순조 때 전주 이씨가 남원에서 입주하여 마을에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 뒤에 지초 한약재가 많이 자라는 지초봉이라는 산이 있어 산봉우리 이름을 따서 지초 마을이라 하였다 한다.

신학리

하신(下莘)마을

조선 시대 밀양 박씨가 들어와 설촌되었고 그 뒤 양 씨와 배 씨 등이 들어와 마을을 형성하였다. 당초 마을 이름을 앞 뜰에 삐삐가 많아 신율(莘率)이라고 하였으나 행정구역 개편 때 윗마을은 상신, 아랫 마을은 하신이라고 개칭하였다.

토치(土峙)마을

조선 숙종 때 설촌된 마을로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다. 옛날부터 학이 서식했던 곳이라 하여 ‘학재’ 또는 ‘학치’라 부르다가 해방 후 토치로 불리게 되었다.

오향(午向마을)

조선 중기 평택 임씨와 진주 소씨가 입주하고 남원 윤씨가 입주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 원래는 오향골이라 불렀으나 그 뒤 마을 전 가구가 남쪽을 향하고 있다 하여 오향이라 불렀다.

이평리

이촌(梨村)마을

설촌 시기가 전해지지 않았다. 물이 좋고 평지여서 농사짓기가 좋아 사람들이 한집 두집 모여 살아 설촌 되었다고 한다. 특히 윤 씨와 양 씨의 집성촌이다. 당초에 배 모양의 형태라 하고 마을 뒤에 평바위가 있어 그곳에 배를 매었다해서 ‘배촌’이라는 설이 있다. 행정구역 개편 때 배촌과 평산 마을 두 첫 글자를 본따서 이평이라 하였다.

우와(牛臥)마을

조선 중종 시대에 우 씨, 소 씨, 양 씨에 의하여 설촌된 마을로 면의 최남단에 위치하고 있다. 원래 마을 이름은 소화대(笑花垈)였으나 해방 후 우와로 개칭되었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쏘악재에 쏵을 박고 마을 앞에 소가 누워있는 형국이라 우와라 부르게 되었다. 쏘악재 윗산이 소머리 부분이고 현재 저수지 자리가 소 여물통에 해당하는데 이곳에 저수지를 파고 나니 가난했던 마을이 잘 사는 마을로 바뀌었다고 한다.

평산(平山)마을

조선 시대 설촌된 것으로 추정되나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다. 각 성받이로 많은 성씨들이 살았다. 원래 이름은 평사(平沙)였으나 200여 년부터 마을이 평야지대에 위치하였고, 마을 뒷산이 평야지에 우뚝 솟아 평산이라 이름하였다. 많을 때는 약 40여 호가 살았으나 지금은 저수지로 수몰되어 우와와 합병되어 약 7호가 살고 있다.

둔사리

이사(耳寺)마을

옛날부터 큰길이 열려 있는 분지여서 피난하기에 적당한 곳이다. 조선 선조 25(1592)년 임진란을 피하여 이천 서씨, 밀양 박씨, 남원 양씨가 정착하였고, 그 후 평택 임씨가 입주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지금도 견두산(犬頭山) 및 수리봉에는 그 당시 피난하였던 석굴들이 있다. 30여년 전만 해도 석굴에 제사를 지냈으나 지금은 지내지 않고 있다. 마을 뒤에는 지금도 불당(佛堂)이란 지명이 있고 미륵불로 다듬어진 돌과 기왓장을 발견할 수 있어 절터였음을 증명해주며 현재 마을 이름을 쓰는 이사는 폐가가 된 절 이름에서 유래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둔기(屯基)마을

설촌 시대는 조선 시대 임진란을 피하여 지 씨, 양 씨, 두 성씨가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임진란 때 의병이 마을 뒷산에 머물러 갔다 하여 ‘둔터’라 부르다가 한자로 기록하면서 둔기로 칭하였다.

하무(下霧)마을

조선 선조 때 천안인 전수현(全守賢)이 임진왜란을 피하기 위해 정착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하무라 함은 전수현 부부가 처음 마을 뒷산인 둔사령(屯寺嶺)에 입산하여 성을 쌓고 거주하니 안개가 10여 일간이나 끼어 사람을 구분 못하게 되므로, 하산한 후 마을을 형성하면서 안개 속에 숨었다 하여 무은(霧隱)이라 했는데 ‘무늬’라 하다가 무은의 아랫마을이라 하여 하무라 불렀다.

상무(上霧)마을

임진왜란을 피하여 밀양 박씨와 남원 양씨가 정착함으로써 마을이 형성되었다. 원래는 주야로 안개가 자욱하여 그 속에서 피난을 하였다 하여 무은(霧隱)이라고 하다가 무은의 윗마을이라 하여 상무라 하였다.

시상리

시랑(侍郞)마을

고려 시대 시랑 벼슬을 한 배 씨가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옥녀봉에 옥녀가 사내를 모신 형이라 하여 시랑이라 했다고 하고 또 한 설은 배 씨가 시랑 벼슬을 해서 시랑이라 했다고도 한다.

상신(上莘)마을

마을이 언제 설촌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김해 김씨의 11대 손이 그곳에서 살았기 때문에 약 300여 년 전으로 추정하고 있다. 꽃정이라고도 불렀다. 그 뜻은 꽃 화(花), 정자 정(亭)이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화심이라는 명당이 있어서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후에 마을 앞 논두렁에 삐삐가 많아 상신이라 칭하게 되었다.

콘텐츠관리

  • 담당부서 산동면
  • 담당자 전가영
  • 연락처 061-780-8554
  • 최종수정일 2023-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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