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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면 위치도

마산면 마을유래

연혁

마산면은 대평, 갑동, 장동, 궁산, 우전, 용수, 황둔, 서촌, 상사, 하사, 광천, 가랑, 냉상, 냉하, 중마, 청천 등 16개 마을을 관할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방광면의 천변, 당촌의 각 일부와 토지면 용두리 일부 지역을 편입하여 갑산, 황전, 사도, 광평, 냉천, 마산리로 개편 관장하였으며 마산 마을 이름을 그대로 면 이름으로 삼았다. 동쪽은 토지면, 서쪽은 구례읍과 광의면, 남쪽은 문척면, 북쪽은 광의면과 산동면에 접해있다.

위치

서쪽으로 서시천을 경계로 구례읍과 광의면이 접경 되었고, 남쪽으로 섬진강을 끼고 문척면과, 북쪽으로는 노고단을 경계로 산동면과 접경하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토지면과 접경하고 있다. 화엄계곡의 하류 화엄천 연변 서남쪽에 비교적 넓은 평야지가 펼쳐져 있다.

마산면 마을

마산리

마산(馬山)마을

마을 설촌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전래된 말에 의하면 맨 처음 청주 곽씨가 이곳에 터를 잡고 정착하여 온 이후 고종 임진(1892년)년에 전주 이씨 이병직(李秉直)이 본면 하사 마을에서 이주하여 오고, 이어서 의령 남씨(鵬澤)가 순천 낙안(樂安)에서, 그리고 진원 박씨, 옥천 조씨 등이 차례로 이주하여 옴으로써 차츰 마을 규모가 커졌다고 한다. 예로부터 ‘중마리’라 불리어 오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청내(淸川) 마을과 합쳐서 법정리명이 마산리(馬山里)가 되었다. 이는 마을 뒷산이 말의 형국이라는데에서 생긴 이름이다. ‘중마(中馬)’란 마산(면)의 중앙이라는 뜻이며, 일명 중마리 역시 ‘말’을 상징하는 마을 이름이라고 본다.

냉천리

냉천(冷泉)마을

농경생활의 적지로 삼한 시대부터 정착한 것으로 추정되며 삼국 시대 불교 전성기에 취락이 형성되었다고 구전되고 있다. 처음 전주 전씨가 마을을 개척하였하며 그 후 전주 최씨가 세종 6년(1424년) 이주하면서 본격적 마을이 형성되었고 다음 청주 한씨, 함양 박씨, 남원 양씨, 창원 황씨, 전주 이씨 등 40여 성씨가 취합하여 약 300여 호의 큰 마을이 형성 되었다.

광평리

광평(廣坪)마을

마을 설촌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맨 처음 순천박씨 군수공파가 1779년에 터를 잡아 후손이 세거하였다. 다음은 탐진최씨 옥강후가 입촌하여 세거(世居)하였으며 전주이씨 양도공파, 보성선씨(1863년), 인동장씨(1839년), 경주이씨 익제공파(1840년경)순으로 입촌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 처음에는 광흥(廣興)이라 칭하다가 광천(廣川)이라 개칭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가랑 마을을 병합하여 광평이라 통칭하게 되었다. 원래 가랑 마을과의 사이에 마산천이 청내골 물과 합류하여 이곳에 와서 넓게 퍼져 흘렀기로 광천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한다.

가랑(加朗)마을

마산면에서 가장 먼저 형성된 마을이라고 전해지고 있으나, 보존된 기록은 없다. 최초 평택 임씨가 터를 잡아 개척하였고, 선산 김씨, 전주 최씨가 입주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현재는 밀양 박씨가 7호로 가장 많다. 마을의 위치가 동과 북이 산으로 막혀있어 햇빛, 달빛이 늦게 비추게 되므로 해가 빨리 떠서 좀더 밝기를 기원하여 ‘가랑리(加朗里)’라고 불렀다고 하며, 가(加)자를 한글로 풀어서 ‘더랑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사도리

상사(上沙)마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사등촌부곡(沙等村部曲) 이라는 기록으로 보아 천년전에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 때 승(僧) 도선(道詵)이 마을앞 강변에서 우연히 이인(異人)을 만나 세사(世事)를 두고 담론을 나눴는 바, 이인이 모래 위에 삼국도(三國圖)를 그려 삼국통일(三國統一)을 암시하자, 도선이 이를 깨닫고, 왕건(王建)을 도와 고려 창업에 기여하게 된다. 모래위에 그림을 그렸다 하여 그 때부터 사둘(沙圖)이라 칭하였다. 고려 현종(顯宗) 11년 5월 지리산이 무너지고 1519년 이조 중종(中宗) 14년 구례에서 지진이 발생하는 등 산사태로 인해 임씨(任氏)성의 마을이 쓸려내려간 것으로 추정하는 데 평전(平田)지역에 현재는 실존하지 않는 “서당골”, “방죽안” 이라는 이름이 지금도 남아있다. 그 후 해주 오씨가 남원으로부터 중종조 (1524년)에 들어오고, 영천 이씨가 순천으로부터 1780년경에 이주해 와 집성촌을 이루었다. 1535년경 문척에서 봉성장씨가 들어와 아랫사둘(下沙)을 이루면서 윗사둘, 아랫사둘로 불려지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합에 따라 사도리가 되었다.

하사(下沙)마을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신라 흥덕왕 시대부터 있었던 마을로 추정되며, 1535년경 봉성 장씨가 문척에서, 1685년경 재령 이씨가 진주에서, 경주 이씨가 장성에서, 1740년경 전주 이씨가 남원에서, 1775년경 광산 김씨가 나주에서 이주해와 마을이 형성되었다. 상사 마을과 같이 신라말기 중 도선의 풍수지리설에 의하여 사둘이라 하였고, 고려 때 사등촌(沙等村)과 사도부곡(沙圖部曲)이 있었다고 한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용두리 일부를 병합하여 사도리라 하였으며 , 이 때 상사, 하사가 통합되었다고 한다.

황전리

황전(黃田)마을

마을이 언제 설촌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화엄사의 동구 마을이란 점을 감안할 때 적어도 고려 중엽 이후 조선조 초기 사이에 이루어진 마을로 추정된다. 마을의 규모가 켜짐에 따라 남단 용수동이 이어져 한 마을이 되고 서남쪽 구릉(丘陵), 동쪽(장궁 진입로 밑)에 있던 우전(牛田) 마을(밀양 박씨 4,5가구)이 1930년경 본동으로 이사해 옴으로써 우전(牛田) 마을이 폐촌되었다. 옛날부터 땅이 비옥하고 들의 곡식이 잘 여문다 하여 황둔(黃芚)이란 이름이 붙여진 듯하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황둔의 황(黃)자와 우전(牛田)의 전(田)자를 따서 법정리 명이 황전리(黃田里)가 되었다.

갑산리

장궁(帳弓)마을

거금 250 여 년 전 창녕 조(曺)씨(윤겸,允謙)와 장씨가 현재의 대지제(大池堤) 옛터에 정착하여 5,6가구가 살다가 지금의 장동(帳洞) 자리로 전부 이주해 옴으로써 차츰 마을을 형성하게 되었다고 하며, 새장동은 무오년(1854년)에 밀양 박씨 봉일(峯一), 성면(聖勉) 두 가구가 갑동(甲洞)에서 이주해 와서 터를 개척하였다 한다. 궁산 마을은 읍내에서 살던 장택인(長澤人), 고광문(高光文)이 경술(1910년)년 합병 이후 여러 가구를 거느리고 이주해 와서 마을 터를 개척한 후 점점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풍수지리설에 의하여 붙여진 전쟁터의 장막(帳幕)인 장동(帳洞)과 무사의 활인 궁산(弓山), 두 마을의 첫 글자를 따서 장궁(帳弓)이라 하였다. 법정 이름은 장궁과 갑산 두 마을을 합하여 갑산리라고 칭하는데 이는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에 갑동과 궁산의 첫 글자를 따서 지은 이름인 듯 한다.

궁산마을

총 가구 18호의 작은 마을로서 인구 54명 중 남자 25명,여자 29명 특별히 대종을 이루는 성씨가 없고 각 성의 집성촌이다. 영세성을 면치 못하는 빈촌으로서 장동과 갑대마을 중간에 끼어 있다. 신라와 백제가 국토를 뺏기 위한 싸움터로 정장들(전쟁터)이란 지명이 오래돼 오고 있으며, 이들에 인접해 있는 갑산리는 원래 갑동과 궁산 마을이 합하여 이루어진 이름으로서 갑옷을 활을 상징하는 지명인 것으로 전해 오고 있다. 그러니까 궁산은 활을 연상케 하는 마을이다. 갑동의 형성은 200년 전이고 궁산은 150년 전으로 보고 있으며 장동마을은 100년 전 쯤에 형성된 마을로 보고 있다. 갑(甲)과 궁(弓)과 장(帳) 삼자는 전쟁터였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 같다. 조선조말엽에 과거에 급제한 훌륭한 선비가 있었다하며 고씨가구에서는 군수도 있었다고 한다.

갑대(甲大)마을

마을이 언제 설촌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조선조 헌종 12년(1846년)에 밀양 박씨<수봉(秀奉)-통훈대부 사헌부 감찰>가 광양 봉강에서 이곳으로 입주하여 왔다는 사실과 그 후 무오(1858년)년에 이 마을의 큰 화재로 집 수 십 호가 탄 적이 있었다는 구전된 이야기로 미루어서 설촌 연대는 이 보다 50~60년쯤 전이 될 것으로 추정 된다. 갑동(甲洞) 마을은 예부터 ‘굼벙골’로도 불리어 왔으며 한들 대평(大坪) 마을의 대(大)자를 따서 갑대라 부르며 이웃 장동(帳洞), 궁산(弓山) 마을과 통합해서 법정리명이 갑산리(甲山里)가 되었다. 굼벙골은 갑동 서쪽 산록에 ‘굼벙이 혈’ 명당이 있다 하여 붙여진 이 마을의 옛 이름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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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담당부서 마산면
  • 담당자 김지성
  • 연락처 061-780-8404
  • 최종수정일 202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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