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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척면 위치도

문척면 마을유래

연혁

원래는 문재면 또는 문척면으로 불렀고 구성, 안지, 전천, 월평, 마고, 죽연, 금평, 토금, 중기, 성자, 산치 등 11개 마을을 관할하였는데, 1914년 4월 1일에 행정구역 통폐합에 의해 간전면과 통합하여 두 면의 이름을 따서 간문면(艮文面)으로 개칭하였고 1946년 8월 16일에 문척면으로 복구하여 월전, 죽마, 금정, 중산 4개 리를 관할한다.

위치

군의 남방인 오산 밑에 위치하며, 동쪽은 간전면에 닿았고 섬진강을 사이로 서북쪽으로 구례읍과 북쪽으로 마산면과 동북쪽으로 토지면, 남쪽으로 순천시 황전면과 닿았다. 마고곡, 천단계곡, 반내골, 동해골 구릉지에 마을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문척면 마을

죽마리

동해(東海, 동구점이)마을

고려 7대 목종왕 5년 마호대사가 묘산암(猫山岩)하부에 '마호사'란 암자를 짓고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처음 입향한 성씨는 김 씨라고 전해지고 있으나 알 수 없다. 묘산암 하부에 암자를 짓고 암자 입구에 마을이 있다하여 동구정(洞口亭)이라 호칭하다가 그 후 왜정초기 마을 산맥이 청룡백호 등의 백운산 지맥산록(枝脈山麓)에 처한 계곡의 산맥이 황룡부주혈(黃龍負舟穴)이라 하여 청룡은 황해바다에, 황룡은 동해바다에 산다하여 마을 이름을 동해라고 했다고 주민들은 믿고 있다.

마고(麻姑, 마고실)마을

약 400여 년 전 임진왜란을 피하여 밀양 손씨 손진흥이 광양에서 입향했고 이어 고 씨, 장 씨, 백 씨의 순으로 입향했다고 전해진다. 마을 형태가 시어머니가 삼을 삼는 형국이라 하여 ‘마고(麻姑)’라고 칭하였다고 한다. 1789년 정조 때 작성된 「호구총수」에는 구례현 문척면 마고리(磨古里)로 기록되어 있고 1892년에 만들어진 「구례현지도」와 1912년에 작성된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문척면 마고리(麻姑里)로 기록되어 있다.

죽연(竹淵, 범멀)마을

마을이 언제 설촌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으나 처음 들어온 성씨는 봉성 장씨 장악(張岳)이 입향하였고 1392년에 제주 고씨 고숭례(高崇禮)가 횡성에서, 1702년경 장흥 고씨 고만인(高萬仁)이 장흥에서, 1727년 밀양 박씨 박도진(朴道縝)이 고흥에서, 1738년 개성 김씨 김서흥(金瑞興)이 개성에서 각각 거주하다가 입향하였다고 한다. 죽연 마을은 ‘벌멀’, ‘범멀(번멀)’이라 통칭하고 있으며 ‘대쏘’라고 부르기도 한다. 풍수지리설로는 큰 동네는 배 형국으로 마을 앞에 앞사공 바위가 있었으나 매몰되었고 뒷사공 바위는 강물에 유실되었다. 배 형국이라 마을에 우물을 파지 않고 1992년 우물을 팔 때까지 섬진강 물을 식수로 이용하였다 한다. 1789년 정조 때 작성된 「호구총수」에는 전라도 구례현 문척면 승연리(升淵里=대쏘)라는 기록이 있으며 1872년에 만들어진 「구례현지도」와 1912년에 작성된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전라남도 구례군 문척면 죽연리(竹淵里)로 기록되어 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문척면과 간전면을 통합하여 간문면이 되었고 문척면 마고리(麻姑里)와 죽연리(竹淵里)를 통합하여 죽마리(竹麻里)가 되었다. 1946년 8월 16일 간문면을 다시 문척면과 간전면으로 분리하면서 구레군 문척면 죽마리 죽연(竹淵) 마을이 되었다.

서당골(書堂洞) 마을

동네가 언제쯤 설촌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아직 발견되지 않으나 처음 들어온 성씨는 봉성 장씨 장악(張岳)이 입향하였다 한다. 1751년에 경주 김씨 김학석(金學奭)이 보성에서 거주하다가 입향하고 광산 김씨가 하동에서 거주하다가 입향하였다 한다. 서당동 마을은 서당이 있던 관계로 서당골이라 불렀으며 죽연 마을의 한 뜸으로 형성되었다가 점차 커진 마을이다. 1789년 정조 때 작성된 「호구총수」, 1872년에 만들어진 「구례현지도」, 1912년에 작성된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기록이 나오지 않았다.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서당이 세워진 후 점차 사람들이 모여 살기 시작했으며 큰 동네(죽연)의 한 뜸으로 있었다. 지금도 죽연의 반(4반)으로 구분되고 있다.

각금(角金, 까끔멀)마을

동네가 언제쯤 설촌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마을이 형성된 시기는 얼마 되지 않는 듯하다. 처음 들어온 성씨로는 제주 고씨, 장흥 고씨, 밀양 박씨가 입향하였다 한다. 각금 마을은 오산에서 뻗어온 비탈진 곳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데 전라도 방언에 비탈진 곳은 ‘까끔’이라 하는 바 이를 한자로 표기하면서 ‘각금’이라 한 것이다. 1789년 정조 때 작성된 「호구총수」, 1872년에 만들어진 「구례현지도」, 1912년에 작성된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기록이 나오지 않는다. 이는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큰 동네에서 분가하여 사람들이 살면서 점차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보이며 큰 동네의 한 뜸으로 있었다. 지금도 죽연 마을의 반(5반)으로 구분되고 있다.

월전리

구성(九城,구억말)마을

동네가 언제쯤 설촌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이전에 거주한 성씨로는 장흥 마씨, 장흥 송씨, 청주 한씨, 청송 심씨, 창녕 조씨, 창녕 신(申)씨가 입향 거주하다가 이거하였다고 한다. 봉성 장씨 장언익(張彦翼, 1495~?)이 구례읍 백련동에서 입향하였고 제주 고씨 고두행(高斗行)이 죽연 마을에서 거주하다가 입향하였다고 한다. 구성 마을 설촌 당시 풍수지리설로 금거북이 진흙에 빠진 금구몰리형국(金龜沒泥形局)이라 마을 이름을 거북구자를 써서 구성(龜城)이라 하였는데 1910년 경술국치 후 한자를 쉽게 쓰기 위하여 아홉구자를 써서 구성(九城)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제주 고씨 선산이 사두형국이고 당산들에는 두꺼비 바우(탕건바우)가 있다. 1789년 정조 때 작성된 「호구총수」에는 전라도 구례현 문척면 구성리(龜城里)로 기록이 있고 1872년에 만들어진 「구례현지도」에도 문척면 구성리(龜城里)로 나온다. 1912년에 작성된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전라남도 구례군 문척면 구성리(九城里)로 기록되어 있다.

봉전(鳳田, 새터)마을

1926년 경주 정씨 정병훈(1902~1988)이 여수 가무내에서 거주하다가 풍수 김오산과 함께 이곳에 이르러 1272번지, 8마지기 논 위에 건축했다. 그 후 황전 면장을 지낸 제주 고씨 고남숙(1272-6번지, 현재 고상법 대지 107평) 등 3명이 풍수지리상 오봉귀소의 명당이라 하여 우물을 중심으로 집을 짓고 마을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그 후 7가구로 늘어났다. 새터라 불렀다가 봉전마을이 되었다. 봉전마을은 풍수지리설로 마을 형국이 오봉귀소형(五鳳歸巢形)으로 다섯 마리 봉이 날아온 터라 마을 이름을 봉전(鳳田)이라 했다고 한다. 구례군 문척면 월전리 구성 마을의 반으로 되어있다.

안지(雁池, 안지멀)마을

임진왜란 후 마을이 형성되었고 마을 전체가 소나무 숲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밀양 박씨가 가장 먼저 입향하였다고 전해온다. 안지 마을은 안지멀, 안지몰, 안지머리 등으로 불리는데 이는 예전에 두 개의 큰 못(1872년 구례현 지도에 선명하게 나온다)이 있고 그 안쪽으로 형성된 마을이라 안못이라 한 것이 안지몰로 와전된 것이다. 동네를 크게 세분하면 안지멀(안지머리), 도롱굴로 구분된다. 1789년 정조 때 작성된 「호구총수」에는 기록이 없으며 1872년에 만들어진 「구례현지도」에도 지명은 없으나 두 개의 못을 그려 놓고 상연(上淵), 하연(下淵)이라 적어 놓았다. 1912년에 작성된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안지동(安旨洞)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로 보아 마을의 역사는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닌 듯싶고 구성리나 전천리의 일부로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천(田川)마을

동네가 언제 설촌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처음에 진 씨가 입향하였다고 전하는데 독다리를 어깨에 메고 와서 놓았다고 한다. 현재 진 씨는 모두 이거하고 거주하지 않는다. 그 후 김 씨, 장 씨 순으로 입향하였다. 1725년경 밀양 박씨 규정공파 사인공세계 박후증[朴厚曾, (1702~?, 오위장)]이 광의면 금성재 부근에서 거주하다가 입향하였다. 이 후 영산 신씨 신광률 조부가 입향하였다. 전천 마을은 풍수지리설로 오산에서 내려 뻗은 능선이 뱀형국처럼 생겨 사진동(巳陣洞)이라 하였는데 일제 때 밭고랑으로 내가 흐른다하여 쉽게 쓰기 위해 전천(田川)이라 했다고 전한다. 전천 마을은 원래 사진동과 같은 의미로 쓰였는데 똑같이 배미물 > 뱀멀 이라는 지명에서 출발하고 있다. 즉 배미 마을, 논(들)이 있는 마을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 배미를 뱀으로 보아 뱀 사(巳)자로 표기하고 멀 > 물은 모으다, 진치다는 의미로 받아들여 진(陣)자를 차용하여 사진동(巳陣洞)으로 한 것이다.
- 배미를 밭으로 보아 밭 전(田)으로 표기하고 멀 > 물의 의미로 받아들여 물과 관계있는 내천(川)자를 차용하여 전천(田川)으로 한 것이다.
동네를 세분하면 신작로를 중심으로 윗동네(상전), 아랫동네(하전)와 문척초등학교 주변의 새터(신기)로 구분된다. 새터는 1950년 6.25 사변 때 중산리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 거주한다. 1789년 정조 때 작성된 「호구총수」에는 전라도 구례현 문척면 전천리(田川里)라는 기록이 있고, 1872년에 만들어진 「구례현지도」에는 문척면 전천리(田川里)로 기록되어 있으며 사창(社倉)이 함께 표시되어 있다. 1912년에 작성된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전라남도 구례군 문척면 전천리(田川里)로 기록되어 있다.

월평(月坪, 넓돌)마을

언제쯤 마을이 설촌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이전에 송 씨가 거주하다가 이거하였다고 하며 1686년경 개성 김씨가 입향하였다고 한다. 월전리 106번지 문점회 집마당에 넓돌(넓은바위)이 묻혀 있어 예전에는 넓돌 마을이라 불렀다고 한다. 풍수지리설로 월평교회 앞쪽으로 산능선이 달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월평(月坪)이라 하였고 마을 앞에 들을 월평들이라 했다고 한다. 1872년에 만들어진 「구례현지도」에는 월평리(月坪里)로 기록이 나온다. 1912년에 작성된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전라남도 구례군 문척면 월평리(月坪里)로 기록이 나온다.

금정리

금평(琴坪, 검덜이)마을

동네가 언제 설촌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월평 마을보다 먼저 생겼다고 하며 1868년 봉성 장씨가, 150여 년 전에 광산 김씨가 입향하였다고 한다. 풍수지리설로는 마을 형국이 거문고혈로 마을 우측에 거문고 줄맨바위가 6개 있었는데 경작이 불편하다 하여 여러개를 파괴했다. 마을 우측에 여시박굴이 있으며 원 줄맨바위가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이 바위들의 배치가 마치 거문고의 안족(雁足, 기러기발)과 흡사하므로 거문고처럼 생긴 마을이라 하여 마을 이름을 검덜이(금평,琴坪)이라 했다고 한다. 본래 검은바위 여러개가 들녘에 있어 검들이라 불렀는데 이를 한자로 표기하면서 금평이라 한 것이다. 마을을 세분하면 동네 새미를 경계로 웃춤, 아랫춤으로 구분된다.또 금평 마을과 다리 건너 월평 마을을 합하여 양촌이라 부르기도 한다. 1789년 정조 때 작성 된 「호구총수」에는 기록이 없으며 1872년에 만들어진 「구례현지도」, 1912년에 작성된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전라남도 구례군 문척면 금평리(琴坪里)로 기록되어 있다.

토금(土金, 토고미)마을

동네가 언제쯤 설촌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으나 450년 전 배목인이 거주하다가 이거하였는데 현재 배 씨는 거주하지 않는다. 420년 전 안동 김씨가, 400년 전에 의성 김씨가, 370년 전에 천안 전씨가, 180여 년 전에 광산 김씨 예조판서공파가 입향하였다고 한다. 토금 마을은 오봉귀소형국(五鳳歸巢形局)으로 피난지라 한다. 또 큰애기 뒤꼭지형이라 하는데 오봉산이 섬진강변으로는 바위가 보이나 마을쪽으로는 바위가 보이지 않는다. 상사 바위가 토끼 머리에 해당하는데 토금 마을은 토끼의 꼬리에 해당한다고 하여 토끼가 꼬리를 돌아보는 형국이라 마을 이름을 토고미(兎顧尾)라 하였다 한다. 1789년 정조 때 작성된「호구총수」에는 전라도 구례현 문척면 토고리(吐古里)로 기록되어 있고 1872년에 만들어진 「구례현지도」에는 토고미리(兎顧尾里)로 나타나 있다. 1912년에 작성된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전라남도 구례군 문척면 토금리(土金里)로 기록되어 있다.

화정(花亭, 감남징이)마을

동네가 언제 설촌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1745년경 성주 배씨가 순천에서 입향하였다고 한다. 화정 마을은 꽃쟁이, 감남징이, 배나락이 등으로 불린다. 꽃쟁이의 본뜻은 곶쟁이라 한 것이 와전되어 꽃쟁이가 된 것이다. ‘곶’은 ‘구미’의 상대말로 산등성이가 강이나 들쪽을 향해 쭉 내민 곳에 붙는 지명이다. 바다에서는 반도와 만(灣)에 ‘호미곶’, ‘장산곶’, ‘한구미’, ‘청사구미’, ‘휘영구미’ 등으로 우리나라 지명에 널리 쓰인다. ‘곶징이’, ‘꼿징이’을 한자로 쓰면서 ‘곶’을 花로, ‘징이’를 亭 으로 적은 것이다. 감남징이는 이곳에 감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어 이렇게 부른 것이다. 만약 ‘감남징이’를 한자로 표기한다면 枾木亭으로 표기할 것이다. 배나락이는 배를 타던 나루터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일제강점기 때 간문면사무소가 있었다. 마을을 세분하면 웃뜸, 아랫뜸으로 구분된다. 1789년 정조 때 작성된 「호구총수」, 1872년에 만들어진 「구례현지도」, 1912년에 작성된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간전면 화정리(花亭里)로 기록되어 있다. 1946년 간문면을 다시 분리할 때 구례군 문척면 금정리 화정 마을이 되었다.

백운암(白雲庵) 마을터

동네가 언제쯤 설촌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으나 예전에 이곳에 백운암이란 암자가 있으면서 사람들이 모여살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는데 숨어살기에는 아주 적당한 곳이지만 평상시에 살기엔 힘든 곳이다. 이전에 거주했던 성씨는 함안 조씨, 김해 김씨, 전주 최씨, 창원 정씨, 재령 이씨, 경주 최씨, 진주 강씨, 밀양 박씨 등이 있다. 300년 전 함안 조씨가 함안에서 거주하다가 입향하였다고 하는데 1948년 11월 이후 폐촌되었다. 백운암 마을은 토금 마을보다 더 오래전에 형성되었다고 전해오는데 백운암이란 암자 때문에 그 이름을 따서 백운암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마을을 세분하면 양지쪽, 음달쪽으로 구분하였다. 1789년 정조 때 작성된 「호구총수」에는 전라도 구례현 간전면 백운동리(白雲洞里)로 기록되어 있고 1872년에 만들어진 「구례현지도」에는 기록이 없으며 1912년에 작성된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전라남도 구례군 간전면 백운암리(白雲庵里)로 기록되어 있다. 1948년 여순사건 이후 소개되어 폐촌되었다.

중산리

중산(中山)마을

중기, 성자, 산치의 3개 자연 부락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중기 마을에는 임진왜란 당시 연일 정씨 1가가 왜란을 피하여 정착하였고 성자 마을은 웃성자, 넙박골, 성자의 작은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금녕 김씨가 맨 처음 웃성자에 정착하여 부락을 형성하였고 여수·순천 10·19사건으로 웃성자와 넙박골 주민이 성자로 소개되었으나 수복 후 원위치로 돌아갔다. 산치 마을은 임진왜란 전에 천왕치라는 곳에 김해 김씨 5~6호가 정착한 후 임진왜란 말기에 영월 엄씨가 동굴 땅에 입주하여 번창하였다. 원래는 동굴땅(산치) 성자동, 중터(중기), 천황재 웃성주골 등으로 불러졌는데 임진왜란 시부터 중기, 성자, 산치로 불려 왔는데 마을 안쪽으로 고봉 준령이 솟아 있고 마을 한가운데 내가 흐른다 하여 중기라 하였는데 중기 부락의 중자와 산치 부락의 산자를 따서 중산리라 칭하였다고 한다.

중기(中基, 중터)마을

마을이 언제쯤 설촌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으나 1,600년경 영일 정씨(정운창 6대조)가 순천 서면 월곡리에서 입향하였다고 한다. 이전에 거주한 성씨는 배바우에 1호(정씨), 국골에 1호, 매바우골에 1호(문종자)가 거주하였다. 1789년 정조 때 작성된 「호구총수」, 1872년 만들어진 「구례현지도」에는 기록이 없다. 1912년에 작성된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구례군 문척면 중기리(中基里)로 기록되어 있다.

성자(聖子, 성재동)마을

동네가 언제 설촌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으나 1940년 탐진 최씨가 승주군 황전면 가수리에서 입향하였고 토지면 연곡리에서 밀양  손씨가 입향하였다. 원래 성자 마을은 학교가 있던 곳이 본래의 터라는 설과 뒷골에 있었다는 설이 있다. 뒷골에 있던 동네가 산사태로 없어지고 현재의 마을터로 옮겨졌다는 설이 있다.(※ 1938년 삼성교가 개교되었고 1940년 탐진 최씨가 입향, 설촌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학교가 있던 곳이 마을 본래의 터라는 점은 신빙성이 희박하다.) 성자 마을보다 웃성자 마을이 먼저 생겼다. 1894년 의병 당시 경상도 모 지방에서 금녕 김씨 3형제가 의병이 되었는데 셋째가 이곳으로 입향, 둥주리봉 밑에 정착하여 5가구가 거주하였다. 그 후 해방 당시 박시우, 심씨(심성수 부친 1가구), 강판조 등이 들어와 1988년경까지 7가구가 거주하다가 김신조 사건 이후 폐촌되고 독가촌으로 이주하였다. 성자 마을은 성재동, 성적골로 불리는데 이를 한자로 표기한 지명이다. 마을에서는 성인들이 살았다하여 성자라 하였다는 설이 있다. 마을을 세분하면 성자, 웃성자, 독가촌, 뒷골로 구분된다. 1789년 정조 때 작성된 「호구총수」에는 기록이 없으며 1872년에 만들어진 「구례현지도」, 1912년에 작성된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문척면 성자동(聖子洞)으로 기록되어 있다.

산치(山峙, 매재골)마을

동네가 언제쯤 설촌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으나 400년 전 임진왜란 때 영월 엄씨가 토지면 연곡에서 거주하다가 입향하였다고 하며 임란 후 진주 강씨와 청주 한씨가 입향하였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는 100호 이상이 거주하였고 6.25 이후 70여 호로 줄었다고 한다. 2005년 기준 17여 호가 살았다고 한다.  동불댕이골에 1호가 거주하였는데 1938년경 연안 이씨 3형제 중 이중령(1902~?)이 순천 별량면 노동 마을에서 2차 대전이 일어나자 입향 거주하였다가 1949년경 전북 완주군 구이면으로 이거하였다. 정새미골에도 1호가 거주하였는데 1980년경까지 암자(막터)가 있었다. 산치 마을은 매재골이라 부르며 동불댕이라고도 한다. 매재골은 산고개 아래에 있는 마을을 의미하며 한자로 표기한 것이 산치(山峙)이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양전(순천 황전, 구례 간전면)지간에 대지가 있다하여 시제묘가 많았다고 한다. 1789년 정조 때 작성된 「호구총수」, 1872년에 만들어진 「구례현지도」, 1912년에 작성된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문척면 산치리(山峙里)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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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담당부서 문척면
  • 담당자 조경화
  • 연락처 061-780-8253
  • 최종수정일 2023-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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