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4.18. ~ 4.20.

화엄사 시설지구 등 구례군 일원

지리산남악제

지리산남악제 및 군민의 날 행사 추진위원회 061)780-2727

남악제란?

  • 인쇄하기

남악제(南岳祭)

남악제는 삼국 시대부터 나라의 평화와 백성의 안정 및 풍년을 기원하며 나라의 주도로 남악(지리산)산신에게 올리던 제사이며, 천여 년이 넘도록 진행되어온 우리 민족 고유의 제례행사다.

우리 선조들은 예로부터 하늘과 큰 산에 제사 지내는 풍속이 전해 왔다. 삼국시대 이후 통일신라와 고려·조선은 비록 왕조를 달리 하고 있었지만 모두 이름있는 산천에 국가적인 차원의 제사를 올렸다.

신라는 주변 국가들을 정복한 뒤 토함산을 동악, 지리산을 남악, 계룡산을 서악, 태백산을 북악, 팔공산을 중악인 5악으로 정하고 주재자인 산신에 대한 제사를 올렸다.

고려 태조 왕건은 산신신앙을 적극 수용하여 민심을 잡으려 하였을 뿐 아니라, 국가가 주도하는 산신 제사를 통해 고려 왕실의 수호와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였다. 그래서 고려는 백두산을 북악, 묘향산을 서악, 금강산을 동악, 삼각산을 중악, 지리산을 남악으로 삼아 제사를 올리고, 천신天神과 5악·명산·대천·용의 신을 섬기는 팔관회를 성대하게 거행하였다.

조선에서는 지리산을 남악으로 지정한 뒤 국가적인 차원에서 받들었다. 1393년(태조 2)에는 지리산을 호국백護國伯으로 정하였고, 1456년(세조 2)에는 지리산을 5악의 하나인 남악으로 삼은 뒤 매년 국가가 주도하는 산천제사를 올렸다. 조선시대 5악은 동악 금강산, 남악 지리산, 중악 삼각산, 서악 묘향산, 북악 오대산이었다.

남악제는 신라 때부터 중사(中祀)로 모셨다. 당시에는 천왕봉에서 제사를 지냈던 것으로 추측되고 고려에 이르러서 노고단(老姑壇)으로 옮겨서 지냈다. 그리고 조선 초 세조 2년(1456)에 지리산이 또 남악으로 정해지면서 남악사가 노고단에서 아래로 내려왔는데 그 위치는 갈뫼봉 북쪽 내산면(山洞) 좌사리 당동이라고 전해온다. 그러다가 다시 광의면 온당리 당동으로 이전하였다.

구례쪽으로 옮겨 설치된 조선시대의 남악사는 1737년(영조 13)에 남원부사의 전격적인 지원으로 크게 보수되었는데, ‘智異山之神’이라 쓰여진 위패가 모셔져 있있고 매년 봄과 가을·정초에 왕명으로 제사를 올렸다. 혹은 재난이 있을 때마다 별도로 제사를 올리기도 하였다. 헌관은 당상관, 대축은 수령, 집사는 생원·진사·유생들이 맡았다. 제물은 관에서 마련하였다. 이전에는 건물이 3칸 뿐이어서 제관들이 불편해 하였다. 그래서 1737년에 남원부사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여러 건물들을 마련하여 규모와 의전을 일신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국가주도의 제사로 일관되었던 남악제는 시간이 흐르면서 성리학 주도의 조선사회에서 그 의미를 잃어갔으며 지방관들도 대리인을 보내 제사를 지내는 등 무성의하게 대응하였다. 그래도 영조 때 중수 이후로 온당리 당동의 남악사는 1908년 11월 12일에 일제에 의해 헐릴 때까지 국가가 주관하여 지리산신께 제사를 올리는 산신사(山神祠)로 존속했다.

폐사(廢祠)된 뒤로 그 터(온당리 72-1번지)만 남아 있다가 1969년에 구례군민들이 앞장서고 전라남도의 지원으로 화엄사 지장암 옆에 남악사를 10여평 규모로 다시 지었다.

이후 국가 주도가 아닌 민간주도의 제례 및 축제의 일환으로 매년 곡우절(4월 20일)에 ‘지리산 약수제藥水祭’를 열고 남악사에서 국태민안과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고 있다. 약수제라 이름붙인 것은 조선시대에 남악사에서 약수를 떠 놓고 제사를 올렸기 때문이다. 그때 쓰이는 약수는 거자나무에서 나는 즙으로, 특히 곡우절에 받는 즙이 만병통치의 효험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곡우절을 기해 남악사에 제례를 행하였던 것이다. 구례군은 2000년부터 ‘남악제’로 명칭을 바꾸어 천년이 넘는 유구한 전통을 이어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1993년에 온당리 당동 남악사지를 목포대학교 박물관에서 시굴 조사한 바 건물지에서 수습된 유물의 성격으로 보아 통일 신라 말 또는 고려 초에 사찰이 있었을 가능성이 많으며 사찰이 없어지고 조선시대에 들어서 남악사가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한 바 있다.

속수구례지(續修求禮誌)는 남악사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군의 북쪽 예전 소의면(所義面) 립모봉(笠帽峯) 아래에 있다. 구(舊) 내산면(內山面) 당동(堂洞)에 있었으나 어느 해에 이곳으로 옮겼는지 알지 못한다. 신라시대에는 중사(中祀)를 지내는 곳이었고, 백제 고구려 때에도 그러하였다. 조선 태조, 세종 시에는 제사를 지내기도 하고 안 지내기도 하였다. 세조(世祖) 2년(1456년) 5악(嶽)을 정할 때 이곳이 남악(南嶽)이 되었다. 정전(正殿)은 3칸, 전사청(典祠廳)은 4칸, 재실(齋室)은 5칸이다. 향과 축문은 조정에서 보냈으며, 헌관(獻官)과 대축(大祝)은 지방관과 근처 고을의 수령, 진사 1명으로 행하고, 유림에서 제사를 도왔다. 광무(光武) 원년(元年:1897년) 가을에 경성(京城) 남쪽 교외에서 망사(望祀)를 행하였다. 융희(隆熙) 2년(1908년) 11월 12일에 제사를 없앴다.”

  • 중사(中祀) :
    국가에서 지내는 제사를 경중에 따라 대, 중, 소의 세 등급으로 나눈 가운데서 둘째 등급의 제사를 이른다. 대사는 종묘(宗廟)·영녕전(永寧殿)·사직(社稷)의 제사. 중사(中祀)는 풍운뇌우(風雲雷雨)와 악독해(嶽瀆海), 선농(先農)·선잠(先蠶)·우사(雩祀)와 문선왕(文宣王:공자)·단군·기자·고려 시조의 제사. 소사는 마조제(馬祖祭)·마사제(馬社祭)·마보제(馬步祭)·명산 대천(名山大川)에 대한 제사 《大典會通 禮典》
  • 망사(望祀) : 제사지내려는 산천에까지 가지 않고 먼 곳에서 바라보고 지내는 제사. 망질(望秩). 망사(望祠).

qr코드이미지

QR코드
왼쪽 QR Code 이미지를 스마트폰에 인식시키면 자동으로 현재페이지로 연결됩니다.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만족하십니까?

자료관리:
총무과 정보통신담당
전화:
061-780-26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