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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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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동면 마을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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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혁

남원부 산동방(山洞坊)으로 1864년경에 내산동과 외산동으로 분면되었는데 광무원년(1897)에 구례군에 편입되었고 지리산 안쪽의 내산면과 바깥쪽의 외산면이었다. 내산면은 계척, 연관, 현천, 삼성, 수락, 중기, 상원덕, 하원덕, 달전, 수평, 내효, 외효, 구산, 반평, 하관, 사포, 월계, 상위, 하위, 평촌, 신평, 대양, 대음, 반곡, 창촌, 상관, 좌사, 당동, 등 28개 마을이었고 외산면은 정산, 탑동, 원동, 시랑, 상신, 하신, 한천, 지초, 외온, 내온, 이촌, 평산, 우와, 오향, 토치, 둔기, 이사, 상무, 하무 등 19개 마을이었다. 그런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탑정, 원촌, 시상, 외산, 이평, 신학, 둔사 등 7개 리로 구례군 외산면으로, 계천, 수기, 원달, 내산, 관산, 위안, 대평, 좌사 등 8개 리로 구례군 내산면으로 개편하였는데 1932년 11월 1일에 내산면과 외산면을 병합하여 산동면으로 개칭하였다. 산동은 지리산 밑의 골짜기이므로 ‘산골’이라 불렀고 고려 때 산동부곡(山洞部曲), 조선 시대에 산동방(山洞坊)이라 불렀으며 산동원(山洞院)이 원촌에 있었다. 동쪽으로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 남쪽으로 토지면, 마산면, 광의면, 용방면, 서쪽으로 곡성군 수지면과 고달면, 북쪽으로 전라북도 남원시 주천면에 닿았다.

위치

구례에서 가장 북쪽 끝에 있다. 동쪽으로 경남 하동군, 서쪽으로 곡성군 고달면, 북쪽으로 전북 남원시와 경계가 닿았고 남쪽으로 용방면과 광의면이 붙어 있다. 수락골, 산동골, 둔산골에 있는 면이다. 말 그대로 지리산 깊은 산골 마을이다.

수락(水落)마을 - 수기리 -

기본현황

(2008. 12월 현재)

기본현황
인구(명) 주택(호) 경지면적(ha) 임야(ha) 기타
총인구 면적
13 14 27 10 392.82 11.06 13 360 8.22
마을형성 및 지명유래

폭포에서 차로 5분 정도 오르면 수락 마을이 나온다. 현재 8가구가 살고 있다. 논밭이 없다. 산자락 편편한 언덕배기에서 산막을 치고 살던 화전민 마을이다. 조선 시대에는 피난지였다. 양길순은 산골 여기 저기에서 산막을 치고 감자를 심고 산채를 뜯어 살아왔는데 수락 마을에 집이 한 채 있던 곳을 ‘독가청’이라 부른 곳이 2곳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안동 권씨가 8대째 살았는데 그 전에도 사람이 살았으며 마을이 가장 컸을 때는 40여 가구였다. 일제 때 꼿밧등(꽃밭등)에 일본장군이 일장기를 들고 서 있다가 독사에 물려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여순 사건 때 토벌군이 반란군에게 해준다고 주민을 삼성 마을로 소개시키고 마을에 불을 질러 태워 버렸다. 1950년 중반에 돌아와 집을 짓고 살아왔다고 했다. 1974년 김신조 등 무장간첩 난파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 정부에서 폭포 아래로 이주하면 보조금을 준다고 하였으나 마을 사람드이 반대하여 산막에서 수락 마을로 내려와 모여 살았다. 그 때 당시에는 30여 가구가 살았다고 한다. 1999년경까지 섣달 그믐 밤 12시에 당산제를 지냈다. 호랑이가 해를 주지 않고 하려고, 그런데 지금은 초져녁에 막걸리를 붓고 절을 올리고 있다. 약식 당산제를 지낸 것이다. 임진란 때 해주 오씨가 피난터로 들어와 정착함으로써 마을이 형성됭다 한다. 수락폭포 물이 떨어진 마을이라 하여 수락이라 하였다.

민속놀이
  • 옛날에는 당산제를 지냈으나 지금은 지내고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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